핀테크/IT > 5초만에 해외 송금하는 '페이팔' 한국선 무용지물…성장판 닫힌 핀테크

5초만에 해외 송금하는 '페이팔'

한국선 무용지물… 성장판 닫힌 핀테크

스마트폰에 해외 송금 앱 '페이팔'을 깔고 싱가포르에 있는 지인에게 송금하는 데 채 5초가 걸리지 않았다. 비밀번호를 눌러 로그인한 뒤 지인의 이름·이메일을 찾아 보낼 돈을 입력하기만 하면 된다. 통장에 돈이 없으면 신용카드 한도를 이용해 송금할 수도 있다. 한국이라면 카드사에 연 20% 고액 이자를 내고 현금서비스를 받아 송금해야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송금 수수료도 저렴하다. 국내 은행에서 외화 100만원을 송금하면 3~4만원의 수수료가 붙지만, 페이팔을 이용하면 1만원(송금액의 1%)만 내면 된다. 23개국 통화 송금이 가능한 서비스이지만, 원화 송금은 불가능하다.

구태언 테크앤로 변호사는 "한국은 외환관리법 등의 규제가 엄격하다 보니, 이미 다른 나라에선 널리 활용하는 저렴한 송금 서비스마저 이용할 수 없다"며 "국내 핀테크 산업 전체가 규제로 막혀있다 보니 소비자보단 은행·카드사만 배를 불려주고 있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핀테크 산업의 성장판이 닫히고 있다. 해외에선 되는 일이 국내에선 안 되는 '갈라파고스식 규제' 탓이다. 핀테크 신기술에 한해 일단 진입을 허용하는 '금융혁신지원 특별법'은 현재 국회 상임위원회(정무위원회)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금융당국도 핀테크 활성화를 위한 기본 방향은 세웠지만, 여전히 당국이 허가한 사업만 할 수 있도록 하는 '소극 행정'에 머물러 있다.

'천송이 코트'로 부각된 핀테크 규제…한국은 여전히 '후진국'

핀테크 규제가 수면 위로 오른 건 박근혜 정부 때다. 박 전 대통령이 2014년 3월 열린 '규제개혁 끝장토론'에서 공인인증서를 요구하는 불편한 결제 방식 탓에 중국에서 '천송이 코트'를 구매하지 못한다며 대책 마련을 주문했다. 천송이 코트는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텔런트 전지현이 입은 트렌치코트로 중국 한류 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진통 끝에 올해 3월 공인인증서 의무 사용을 폐지한 법안이 입법 예고됐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은 온라인 핀테크 시장에선 '후진국'이다. 회계·컨설팅법인 언스트앤영(EY)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온라인 이용자 중 핀테크 서비스를 이용하는 비중은 중국이 69%, 인도도 52%에 달한 반면 한국은 32%에 불과했다. 전 세계 평균인 33%에도 밑도는 수준이다.

핀테크 신사업이 법적 문제가 없는지를 검토해 알려주는 금융위원회의 유권해석 회신 기간도 길게는 426일이 걸린 경우도 있었다. 평균 회신 기간은 69일이다. 간발의 차로 사업을 선점당할 수 있는 신기술 전쟁에서 정부의 굼뜬 행정이 방해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핀테크 업체 관계자는 “유권해석이 늦어지면 새로운 사업 착수가 늦어지거나 타이밍을 놓치기 때문에 사업모델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가 없다”라고 하소연했다.

정치권·노조 "재벌 사금고화 우려"에 규제 완화 올스톱

국내 핀테크 산업 규제가 좀처럼 완화되지 않는 것은 신기술 도입으로 입지가 줄어들 수 있는 금융사와 노동조합의 반발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시민사회단체와 정치권까지 '규제 완화 반대 동맹'을 형성한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과 참여연대 등 진보 성향 시민단체와 정의당, 금융노조 등은 지난 8월 문재인 대통령도 강조한 은산분리(산업자본의 금융자본 지배 금지) 완화 방침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 이들은 신기술 진입을 위해 계류 중인 규제 샌드박스에도 반대한다. "대기업이 은행을 사금고처럼 쓸 수 있고, 무분별한 규제 완화로 개인 정보 보호 등 공익을 침해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들 단체가 직접적으로 핀테크 활성화를 반대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핀테크가 상용화하려면 규제 샌드박스 도입이 필수적이고 알리바바 등과 경쟁할 수 있는 글로벌 핀테크 기업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대기업의 금융시장 진입도 허용될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을 강력히 반대하는 목소리가 크다 보니 결국 핀테크 산업 성장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금융 사고 발생하면 관료에 '무한 책임'…'관료 보신주의' 키워

관료들도 이 같은 반대 여론을 이유로 규제 완화에 소극적이다. 또 금융 산업엔 특히 정부가 시장을 통제해야 한다는 '관치 금융'의 논리도 작동하기 때문에 중국처럼 '안 되는 것 빼곤 모두 허용'하는 네거티브 방식의 규제가 도입되지 못한다. 특히 과거 부실 저축은행 사태와 동양 상태 등 금융 사고가 발생하면 투자자들이 집단행동을 벌여 규제 완화에 앞장선 관료에게 '무한 책임'을 물어 왔다. 여기에 감사원 등 사정 기관까지 나서 책임을 묻는 과정이 반복돼 왔기 때문에 관료 집단 특유의 '보신주의'가 형성되는 것이다.
서강대 블록체인 연구센터장 박수용 교수는 "새로운 시도에는 시행착오가 따르게 마련이지만, 한국에선 규제 완화 이후 조금의 부작용이라도 생기면 모두 담당 공무원을 비난한다"며 "'부작용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정책 목표가 되다 보니 관료 집단에선 '일단 규제로 막고 보자'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가난한 청년층 '빈(貧)테크' 열풍…소상공인 대출 만든 인도

한국이 이렇게 주춤하는 사이 해외 주요국의 성장세는 눈부시다. 지난해 독일의 핀테크 벤처기업이 받은 총투자금은 5억4000만 유로(7000억원)로 2015년에 비해 3.4배 성장했다. 나라별 경제 상황에 맞는 핀테크 서비스들도 출현하고 있다. 일본에선 가난한 청년층을 위한 일명 '빈테크' 열풍도 분다. 신용카드를 만들기 어려운 저소득 청년들이 지인들에게 십시일반 자금을 모으는 앱(폴카), 급료를 미리 당겨 지급 받을 수 있는 앱(페이미) 등이 대표적이다. 인도에는 소상공인을 위한 온라인 대출 전용 앱(렌딩카르트)도 생겨났다.

"금융혁신지원 특별법 시행하고 '은산분리' 패러다임 깨야"

전문가들은 한국의 핀테크 산업이 활성화되려면 국회 계류된 금융혁신지원 특별법부터 속히 통과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또 일각에선 그동안 공론장을 지배해 온 '은산분리' 패러다임도 깨야 한다는 지적도 내놓는다. 중국 핀테크의 대표 기업인 'BAT(바이두·알리바바·텐센트)'은 모두 금융산업복합체다. 은행의 대기업 사금고화가 우려되면, 이를 확실히 제한하고 나머지는 허용하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당국이 감독규정·가이드라인 등을 통해 규제할 때도 혁신 역량을 갖춘 핀테크 스타트업의 진입이 가능한지를 염두에 둬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령 금융위는 최근 로보 어드바이저 규제를 일부 완화했지만, 자본금이 40억원 이상인 법인만 할 수 있도록 최소 요건을 정해 놨다. 아무리 실력 있는 자산운용 전문가와 알고리즘 역량을 갖추고 있어도, 초기 자본이 부족한 스타트업은 진입하기 힘든 것이다. 또 현재 대출·카드 모집인은 한 금융회사당 1곳으로만 전속 계약을 할 수 있는 규제가 있어, 핀테크 기업이 여러 금융상품의 장단점을 비교해 추천·판매하는 서비스를 내놓을 수도 없다.

구자현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세세한 금융감독규정들은 모두 그 나름의 필요성이 있어 만들어졌겠지만, 정책당국도 어떤 규정이 스타트업에 문제가 되는지조차 파악하기 힘들 지경이 됐다"며 "핀테크는 업종 간 경계를 허물어 혁신을 이루는 성격이 있기 때문에 은행·보험·카드사 등 업권별로 나눠 규제하는 체계도 바꿀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글 김도년 기자
제공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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